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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나이팅게일이 그립다

경북일보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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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거금도에 ‘독일마을’이 조성된다고 한다. 1970년 독일로 광부, 간호사로 가셨던 김광남(84)씨 부부가 고향인 고흥 금산면으로 귀향하면서 마을 조성이 시작되었는데 지난해 10월 전남도의 ‘금산 석정지구 새꿈도시 조성사업’에 선정되면서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6만3318㎡(2만평) 부지에 100세대 규모로 건립되는데 전원주택, 커뮤니티시설, 파독 근로자 전시관, 노인복지시설 등 복합주거단지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고흥군은 베를린, 쾰른,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등 4개 도시에 설명회를 가졌는데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였다 한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겨우 100세대 규모이긴 하지만 해묵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다는 마음이 들어서 기쁘다.

반포지효의 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은공을 아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수년 전 학교가 주관한 글로벌 챌린저 프로그램 지도로 독일을 찾았던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게스트하우스의 친절하신 노부부, 떠나오기 전날 일정에 지친 학생들을 위해 삼겹살 파티를 준비하셨다. 아끼고 아끼던 한국 소주를 내어 일일이 따라 주시면서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처음 독일에 도착했을 때 겪어야 했던 서러움,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천시, 독일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라서 무시당했던 일, 그래도 결혼을 하고 따님을 훌륭하게 키워 결혼시킨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울고 웃었다. 당시 주인 할머니께서는 파독 간호사로 처음 독일에 올 때 꿈꾸던 라인강과 로렐라이 언덕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회상하며 피식 웃으셨다. 동경하던 아름다운 유럽국가 독일은 도착 즉시 사라지고 독일 의료기관이나 요양기관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기억, 작은 체구에 거구의 독일인 환자들을 목욕시키고 간병하느라 고생했던 이야기, 더 어려운 것은 언어 불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독 파견 간호원을 위한 독일어’와 ‘독일어 사전’을 닳아 헤어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고 하셨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유일하게 버팀목이 된 것은 월급통장과 고향 집에 매달 꼬박꼬박 돈을 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이었는데 황당한 일을 당해 섭섭했던 이야기도 하셨다. 받은 월급을 한국으로 전부 송금했는데 귀국하고 보니 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라는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향에 있는 오빠가 돈을 관리했는데 중간에 귀국하고 보니 오빠도 이사를 해버려서 찾을 수가 없었다 한다. 세월이 흐른 후에 수소문을 해보니 오빠도 사망하고 재산을 물려받은 조카는 사정을 모른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금의환향은 바라지 않더라도 고향땅에 묻히고 싶다는 귀소본능 때문인지 시간이 갈수록 고향에 가고 싶고 더 그리워진다고 했다. 평생을 일한 독일과 조국, 두 개의 뿌리가 있어 좋다고 하지만 살 집이 있으면 언제든지 고향에 가고 싶다는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고흥군의 독일마을 조성 소식은 너무나 반갑고 고맙다. 당시 파견된 간호 인력이 1만명 이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44세대 규모의 남해 독일 마을과 100세대 규모의 고흥 독일마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고흥군의 사례를 참고하여 다른 시군에서도 귀향을 원하는 파독 간호사와 근로자들을 맞을 준비를 하면 좋겠다.

돌이켜보면 근대 한국 근대화를 성공시키고 오늘날의 잘 사는 한국을 만든 밑천은 파독 간호사의 송금 덕분이었다. 1960년대 전화에서 겨우 벗어난 대한민국은 본격적인 경제부흥정책 추진에 외화가 절실히 필요했다. 반면에 세계대전 이후 경제부흥에 성공한 독일은 자본이 넉넉하고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1961년 두 나라는 기술협력과 차관 공여와 함께 광부, 간호 인력의 파견을 진행하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1966년부터 1976년 간호사의 독일 파견이 공식적으로 중단될 때까지 한국 여성 1만226명의 간호인력이 독일에 파견되었다. 당시 파독 간호사들이 매년 국내로 송금한 1천만 마르크 이상의 외화는 한국 경제개발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마치 위기에 처한 영국을 위해 크림전쟁터로 향했던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 나이팅게일’처럼 당시 간호사들은 배고픈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 독일로 갔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들의 공로를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최근 국가발전에 대한 이들의 공헌을 정부 차원에서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고 하니 반갑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코로나19 현장에서 땀으로 범벅이 된 방호복을 입고 가쁜 숨을 내쉬던 천사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들은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픈 환자들의 곁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나이팅게일이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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